Posts

먼저 말해 주는 비서가 더 어렵다

목차4
밤늦게 스탠드 불빛 아래 책상에 앉은 사람이 턱을 괴고 책상 위의 조용한 휴대폰을 내려다본다. 뒤에서 작은 로봇이 다 끝낸 서류 더미 옆에 말없이 서 있다
서류는 다 끝났는데 휴대폰은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

요즘 메일을 읽고 일정을 정리하고 정해진 시각마다 정기 작업을 돌리는 개인 비서 봇을 하나 키우고 있다. 사실 일을 시키면 끝까지 해 오게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금방 됐다. 오래 걸린 쪽은 끝낸 일을 내가 묻기 전에 먼저 말해 주게 만드는 일이었는데 이날 겪은 일도 대부분 그쪽에 몰려 있었던 것 같다.

파일에만 남은 결과

처음 몇 시간 동안은 폰의 채팅창이 조용했다. 그렇다고 봇이 쉬던 것도 아니어서 그동안에도 정기 작업은 제시간에 돌아가며 결과를 계속 내놓고 있었다. 그 결과가 전부 날짜를 붙인 마크다운 파일로만 저장되어 폴더에 쌓여 갔을 뿐이다. 폰의 라이브러리 화면에서도 볼 수는 있었지만 그 화면을 열어 볼 생각을 해야 보이는 자리였으니 채팅으로 온 말이 한 줄도 없는 동안에는 그런 파일이 있는 줄도 알 길이 없었다.

그래서 나는 대화로 알려 주라고 했는데 왜 파일만 남기냐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야 했다. 한 번 말해서는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.

물론 봇 쪽에서 보면 일은 이미 끝나 있었다. 파일이 저장됐고 작업도 성공으로 기록됐으니 봇으로서는 할 일을 다 한 셈인데 정작 내 쪽에서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던 날과 구분되지 않았다. 결과가 있는 줄도 모르는데 폴더를 열어 볼 이유가 있을까? 사람 비서라면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 두면서 다 됐다는 한마디쯤은 하고 갔을 텐데 그 한마디가 빠지고 나니 끝낸 일과 안 한 일이 내 눈에는 똑같아 보였다.

고친 방법 자체는 단순해서 모든 정기 작업이 결과를 채팅으로 보내게 바꾼 것이 전부였다.

특이사항 없어요

그런데 그렇게 바꾸고 나니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다. 정기 작업이 돌 때마다 알릴 거리가 매번 생기지는 않으니 알릴 게 없는 회차에도 봇은 "특이사항 없어요" 한 줄을 보내왔다. 돌아가는 작업이 여러 개이다 보니 이 한 줄도 그만큼 여러 번 올 수밖에 없다.

알림이 오면 일단 폰을 열어 보게 되는데 막상 열어 보면 아무 내용이 없다. 몇 시간 전에는 말이 없어서 답답했던 채팅창이 이번에는 내용 없는 말로 채워지고 있었다.

사람끼리라면 이 한 줄도 확인은 했다는 표시가 되니 나름의 쓸모가 있다. 그런데 같은 표시가 여러 번 이어지면 그때부터는 쓸모보다 피로가 먼저 쌓인다. 알릴 게 있는 메시지를 기다리는 중이라면 더 그렇다.

그래서 알릴 게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요구가 하나 더 붙었고 그 한 줄을 숨기는 기능까지 만들게 됐다. 먼저 말하게 하려면 말할지 말지를 가르는 기준이 따로 있어야 했다. 그 기준이 일을 끝내는 능력과는 또 다른 종류의 판단이라는 걸 이때 조금 알게 된 것 같다.

어디까지 혼자 하게 둘까

따지고 보면 먼저 말하는 문제는 묻는 문제와도 붙어 있었다. 봇이 일을 하다 멈추고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 오면 그 질문 역시 채팅창에 쌓이는 말이 되니 확인받을 일이 많을수록 채팅창은 질문으로 가득 찬다. 그렇다고 아무것도 묻지 않게 해 버리면 되돌리기 어려운 일을 봇이 혼자 처리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게 고민이었다.

이리저리 재 보다가 자율 범위는 결국 두 가지로 좁혀졌다. 돈이 걸린 결제 승인과 본인인증만 나에게 묻기로 한 것이다. 잘못 나간 결제는 되돌리기가 번거로운 데다 본인인증은 애초에 내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어서 이 둘을 뺀 나머지는 봇이 끝까지 해낸 뒤 보고만 하면 된다. 내가 허락한 범위의 PR 도 봇이 직접 merge 한 뒤 보고만 남기는 식이다.

규칙을 이렇게 줄이고 나니 보고의 무게가 달라졌다. 묻지 않고 한 일은 보고로만 알 수 있으니 보고가 빠지는 순간 나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. 처음에 겪었던 그 조용한 채팅창이 여기서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이다.

비서도 모르는 일

마지막으로 걸린 곳은 의외로 비서 자신이었다. 이 비서 아래에는 글을 다듬는 봇이나 사이트를 관리하는 봇처럼 역할별로 나눈 봇이 여럿 있는데 다른 봇이 끝낸 일이 비서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. 그러다 보니 비서가 모르는 일이 생겼다. 나에게 먼저 말해 줘야 할 비서가 정작 할 말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.

이것도 고쳐서 봇이 끝나는 순간 결과 본문을 비서에게도 넘기도록 바꿨다.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 알리는 길만 만들어 두고 비서에게 알리는 길은 빠뜨렸던 셈이다.

처음 채팅창이 조용했던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봇이 일을 하긴 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. 지금 내가 바라는 건 알릴 게 없어서 조용한 채팅창이다.